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부동 전투 (문단 편집) ==== 주요 고지가 선점 당하다 ==== 적은 이때(8월 13일) 수암산 일대를 점령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약 1개사단의 병력을 낙동강에 도하시켜 수암산에 화력을 집중시켰다. 당시 유학산은 아군이 점령하면 임시 수도였던 대구를 방어하기에 유리해지고, 반대로 적이 점령하면 즉시 대구 공격의 발판이 되기에 때문에 확보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러나 이는 제2군단장 유재흥의 철수선 통제와 사단장 백선엽의 제1대대 철수로 말미암아 탈취당하게 되는데, 먼저 유재흥의 오판은 다음과 같다. >제2군단 작명 12호. 83. 8. 11. 18.00 >一. 가 적은 계속 낙동강을 도하하려함. > 나 군은 연합군과 같이 전략적으로 우세한 지형을 확보하려함. >二. 당 군단은 인접부대와 밀접한 협조하에 강력한 엄호부대에 의하여 "Y"선에 진지를 점령하려함. >三. 가 제1사단장은 제1기갑사단과 긴밀한 협조하 X일 20.00 행군개시 상림동~다부동을 경유 "Y"선에 진주하라. > 나 제6사단장은 제1사단 제8사단과 긴밀한 협조하 X일 20.00 행군개시 도원리~군위~미흥을 경유 "Y"선에 진출하라. > 다 군단본부 및 직할부대는 X일 13.00 행군개시 군위~신영~영천 경유 하장(河場)에 진출하라. > 라 각연대는 증강된 1개대대의 엄호부대를 현재선에 잔치(殘置)하며 후퇴는 사단에서 통합지휘하라. > 마 X일은 차후 지시함. >四. 생략 >제2군단장, 육군준장 유재흥 >---- >제2군단 작전명령 제12호 작전명령 제12호로 Y선 철수를 명령한 유재흥은 작전명령에 사단의 철수 경로를 통제하면서 고지 점령 시간을 놓치게 되었는데, 제1사단은 다부동으로 남하한 후 다시 고지를 점령하려고 북상을 했던 반면, 북한군은 지름길을 이용하여 바로 남하하여 점령했기 때문이다. 또한, 작전명령에 표시된 ''''강력한 엄호부대''''는 군단이 내려주던 것이 아니라 사단 독자적으로 해야 했기 때문에 15연대 2대대를 잠시 운용했을 뿐 적을 저지할 별다른 묘책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군단장의 실책만은 아니며 이를 받은 국군 제1사단장인 백선엽 준장의 오판도 크다. 이 작전명령을 받고 군단에 항의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학산 고지를 점령하기로 한 부대인 제12연대 1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무려 사단 지휘소인 동명원까지 빼냈기 때문인데[* 심지어 백선엽은 적이 유학산을 점령하자, 제1대대장인 한순화 소령에게 종용하는 어투로 다시 점령하라고 하였다.] 그 실책은 다음과 같다. 8월 12일 20시에 철수 후 이른 아침 대대는 유학산을 바라보며 하장동 부근 25번도로를 따라 남하하고 있었었다. 이때 대대장은 부대행군을 보러 나온 부연대장에게 유학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부연대장은 "연대도 이점에 착안하여 사단에 건의했으나 사단에서는 지시받은 대로 하라고 하니 난들 어쩌겠느냐"라면서 어딘가 못땅해하였다.[* 이는 백선엽의 전쟁초반 지휘의 한계점에 따른것이다.] || [[파일:12연대 8월 13~14일의 상황.jpg]] || || 저렇게 12연대 1대대[* 12연대는 1대대를 유학산 점령, 2대대를 수암산 점령, 3대대는 예비대로서 정비했다.]를 사단지휘소까지 굳이 뺐다. || 이와 관련한 증언을 들어보면 >"Y방어선이 설정되어 새로운 부대배치를 할때 나는 수암산과 유학산이 감제고지(瞰制高地)로서 중요하니 이곳에다 병력을 배치하자고 사단에 건의를 하였는데 사단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그런데 적이 먼저 진출하여 이 고지를 점령하는 바람에 우리가 근 10일간의 작전에서 많은 희생을 입게 되었다. 사단에서의 반대이유로서는 병력이 없는데[* 여기서 병력이라 함은 제12연대 1대대를 말하는데, 위에 나와있다시피 사단장의 지시로 제1대대는 동명원까지 남하하였다.] 그 고지를 점령시킬 병력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 >▲당시 제12연대 부연대장 [[김점곤]] 중령 증언 >문: 다부동 전투시 낙동강 연안에서 Y선으로 철수시 일선에 배치할 대대를 사단사령부까지 철수시켰다가 재배치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답 : 우리 대대는 금곡리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유학산을 바라보며 하장동 부근의 25번 도로를 따라 행군했는데 이때 대대장께서 부연대장에게 곧장 유학산으로 올라가 방어 진지를 구축하겠다고 건의했음 그러나 사단에서는 대대를 사단사령부가 위치해 있는 동석동까지 철수하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상세히 모르겠음 >---- >육군본부,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 1 』 126p, 당시 제1사단 12연대 1대대 1중대장 이종철 중위 증언 이로써 아군 병력을 배치하기도 전에 유학산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14시에 백선엽이 참모들을 대동하여 정비 중이던 제1대대가 있는 곳으로 와서 유학산에 있는 적을 공격하라 명령했다. 당시 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행군시에는 못 올라가게 하고 이제야 공격을 명령하신다." 하며 울분을 터트렸으나. 명령에 따라 수암산 부근에서는 제2대대를 이용하여 미군의 지원을 받아 19시에 점령하였다. 또한 제1대대도 15시에 673고지를 공격했으나 지형이 험준하여 결국 공격이 저지되었다. 이는 전술적으로 상당한 오판이었기 때문에 군 공간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왜 분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하에서 주저항선을 배치할 일선대대를 주진지 후방 8km까지 행군시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했는지 그 이유가 모호할 따름이다." >---- >『다부동전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81) >"결국 지휘관의 상황판단의 잘못으로 수암산과 유학산을 탈취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결국 국군 제1사단 12연대는 수암산을 탈취하지 못한 채로 미군에게 넘겨주었다.] 얼마만한 아군의 손실을 초래하였던가를 알아야 하겠다."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韓國戰爭史』 홀로 유학산 주봉인 839고지에 있던 제3대대는 유학산 제2봉인 837고지가 제1대대의 철수로 텅 비게 되었으므로 갑작스런 적의 공격을 받고 517고지까지 철수하였다. 14일 수암산을 점령하였던 제2대대는 05시에 이어 369고지를 공격하였으나 적이 저항하여 결국 저지되었다. 그리고 03시에 적 유격대가 아군복장을 한 채 공격해왔으나 1개소대로써 방어하였다. 한편 제1대대는 2차례에 걸쳐 673고지를 공격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원정으로 다시 돌아와 재공격을 준비하였다. >13/8 >"현재 적은 수암산일대를 점령함으로서 보급로를 확보한 후 대구를 공격할 목표로 약 1개사단의 병력이 낙동강을 도하 일부병력은 수암산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음" >---- >'''《제1사단 12연대 외내촌 수암산 유학산전투상보》'''中 >13/8 >"제1대대는 공격목표선 도달시까지 아군 중화기 지원을 받으며 제6중대는 517고지를 경유 316고지로 진출하고 제5중대는 316고지를 우측으로 진출 각각 공격목표선까지 도달시는 일모로 인하야 공격이 부적하아 316고지 전방일대에 배치하는 전장을 정리함" >---- >'''《제1사단 12연대 외내촌 수암산 유학산전투상보》'''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